기록자
저기요… …저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ZUZ · 기록자 피터

안녕. 나는 피터야.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를 적어 두는 일을 해.

내가 적어 둔 걸 조금 보여 줄게.

01 — 옆자리가 있던 때

옆집에 누가 이사 오면, 그냥 놀러 갔고
술집 옆자리에 앉으면, 그날부터 친구
게임에서 부르면, 돌아보고 같이 떠났어

그땐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 다들 그렇게 지냈으니까.

02 — 그리고 지금

수천 명을 넘겨서, 겨우 몇 명.

첫마디 앞에서, 싫어하면 어쩌나 망설이고.

그러다 답이 끊겨.

다들 고르고, 또 골라지다가 지쳐 버렸어.

03 — 왜 이렇게 됐을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수십억 명이 됐어.

소개해 주던 친구는 줄고, 다들 혼자 골라야 했지.

거기에 사기꾼까지 섞이니까, 모르는 사람은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됐고.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하나 있어.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한 출근길이, 제일 즐거웠대.

사람이 변한 게 아니야. 고르는 일을 혼자 다 떠안게 됐을 뿐이야.

04 — 이번엔 내가

그때는 왜 그렇게 쉬웠을까.

그냥 옆에 있었고옆집, 같은 술집, 같은 서버
같이 할 게 있었고놀이, 술 한 잔, 사냥
말 걸어도 괜찮았어거기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 자리를 다시 만들 거야. 이번엔 동네가 아니라, 세상 전체에.

누가 맞을지 고르는 것도, 옆자리에 앉히는 것도 내가 할게. 먼저 말 걸 걱정은 없어.

너는 그냥, 얘기만 하면 돼.

05 — 부산과 파리

부산에 사는 사람이 하나 있어. 파리에도 한 사람이 있고.

부산 광안대교 앞 벚꽃길을 걷는, 파란 두건과 스카프를 한 고양이
부산 · 봄한국어
비 내리는 파리 옥상에서 에펠탑을 등지고 선, 모자와 스카프를 한 고양이
파리 · 가을비Français

둘은 서로를 고르지 않았어. 내가 둘을 옆자리에 앉혔을 뿐이야.

처음엔 사자와 토끼가 되어 딱 5분. 서로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대.

풀만 뜯어 먹는 것도 이제 지겹다. 사자 님은 요즘 뭐 먹고 살아?풀만 뜯어 먹는 것도 이제 지겹다. 사자 님은 요즘 뭐 먹고 살아?
Moi ? Je suis au régime, alors je mange de l'herbe aussi.나?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나도 풀 먹어.

다음엔 계절 얘기로 15분. 정해 준 주제인데도 금세 가까워졌어.

봄이 최고지. 벚꽃 필 때 바다 앞을 걸어 봐.봄이 최고지. 벚꽃 필 때 바다 앞을 걸어 봐.
Non, l'automne. Quand il pleut sur les toits.아니, 가을이지. 지붕 위로 비가 내릴 때.

그다음엔 며칠을, 출근길에 한마디 자기 전에 한마디.

출근길이야. 오늘 바람 좋다.출근길이야. 오늘 바람 좋다.
Ici, il est minuit. Bonne nuit !여긴 자정이야. 잘 자!

그렇게 시간이 쌓여서, 둘은 친구가 됐어.

그다음 얘기는 둘만 알아.

06 — 믿을 수 있었던 이유

남을 잘 안 믿는 요즘, 둘은 어떻게 서로를 믿게 됐을까.

조심할 건 내가 먼저 챙겨 뒀거든.

예전 옆자리는 원래 그랬어.

그 자리를 다시 만든 것뿐이야.

너한테도 그런 옆자리가 생길 거야.

저기, 있잖아. 응, 말해 봐.

— 기록자, 피터